한 권의 책, 한 문장을 만난 적이 있나요? 1

2023. 7. 26. 21:50가정과 건강/Sweet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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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1학기를 마쳤다. 내 통지표에는 “위 학생은 책을 읽고 학생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첫 번째 칭찬이었다. 칭찬이 한 문장으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글자

글이라는 걸 처음 쓰던 날, 나는 글이 무서웠다.

 

어머니는 글만 알아도 세상이 환하겠다고 글 모르는 걸 한탄하셨고, 아버지는 여덟 명의 자식을 두셨지만 한 번도 무릎 위에 아이들을 앉히고 쓰다듬어 주신 적이 없는 분이셨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내 이름 석 자를 쓸 줄 몰랐다. 그리고 다른 동무들은 이름뿐 아니라 한글도 이미 배우고 올 줄 미처 몰랐다.

 

입학 첫날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칠판 앞에 세웠다. 자기 이름을 쓰고 큰 소리로 읽어 보라고 하셨다. ‘용준, 정범, 동영, 승선, 정수 그리고 나’까지 한 학년에 한 반이 전부였고 반 인원은 고작 여섯 명이었다. 1학년 1반 아이 모두 자기 이름 석 자를 칠판에 쓰고 신나게 자기 이름을 외치며 자리로 들어갔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이름 석 자를 어찌 써야 할지 몰라 쭈뼛거렸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종이에 내 이름을 적어 주셨다. 나는 그 글자를 더듬더듬 칠판에 그렸다. 그런데 그 그림에 획이 하나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디에 뭐가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선생님은 자꾸 ‘아래로 줄 하나를 더 그으라’고 하셨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방향 감각 없이 줄을 그어 댔다. 동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 선생님의 답답해하며 노한 목소리, 검은색 칠판에 내가 그은 선도 나를 비웃는 듯했다. 여기저기 줄만 긋다 자리에 앉고 말았다. 여학생은 나 혼자였다. 남자애들 틈에서 짝은 있지만 진정한 내 짝은 하나 없는 빈자리만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마저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학교에 가면 내 얼굴은 놀림의 대상이었다. 노란 고무줄로 내 얼굴을 과녁 삼아 점수 내기를 하는 짓궂은 동무들 틈에서 말도 글도 부족한 어눌한 아이로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고 발표하다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한 학기, 두 학기가 지나갔다. 글자뿐 아니라 문장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문장을 낭독하는 소리도 좋아진 것 같았다. 더듬더듬이 술술이 되어 갔다. 글자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글이 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해한 것을 명확하고 빠르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주말이었다. 보통 주말에는 강으로, 산으로, 운동장으로 야외 수업이라는 명목하에 실내 수업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선생님께서 비도 안 오는데 교실에서 조용히 책을 읽게 시키셨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는 한 명씩 나와 읽은 책을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시키겠다고 하셨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바보 비단 장수 이야기를 꺼냈다. 주인공은 바보였다. 이 바보가 집에서 뒹굴뒹굴하자 보다 못한 어머니가 장사해 보라고 모아 두었던 쌈짓돈을 털어 비단을 사 주셨다. 깜빡깜빡하던 바보는 그만 귀한 비단을 잃어버리게 된다. 화가 난 어머니가 당장 비단을 찾아오라 호령하자 바보는 비단을 찾으러 다니다 결국 말 못하는 부처상 앞에서 비단을 내놓으라고 엉뚱한 푸념을 한다. 대답도 안 하고 그냥 빙그레 웃는 부처님을 보면서 더욱 화가 난 바보가 돌부처를 밀어 넘어뜨리자 그 불상 밑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어서 그 보물로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칭찬이 나에게 찾아오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아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내 딴에는 읽은 내용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 있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말똥말똥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선생님은 재미있다고 바보 이야기에 박장대소를 하셨다. 이야기하는 내내 봄날의 햇살이 학교 교실 가득 반짝반짝 들어와 밝게 비추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학년 1학기를 마쳤다. 내 통지표에는 “위 학생은 책을 읽고 학생들 앞에서 이야기를 잘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첫 번째 칭찬이었다. 칭찬이 한 문장으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후로 나는 정말로 책을 즐겨 읽고, 읽은 내용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바보 비단 장수를 이야기하던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글자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게 보였다.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파악되었다. 그러자 혼자 방바닥을 긁는 바보 비단 장수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시끌벅적한 시장에서 ‘비단 사세요!’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은보화를 얻은 후 다시 주인을 찾아 주려고 하는 착한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왜 바보라고 불렀을까?’, ‘정말 바보였을까?’, ‘바보처럼 살면 정말 복을 받는 걸까?’, ‘바보는 결국 어떻게 살았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글이, 문장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보 비단 장수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글자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와 친구들도 손을 잡고 두둥실 춤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새로운 한 편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출처: 가정과 건강 월간잡지

저자: 최봉희

문학 치료학 박사, 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칼리지 기초 글쓰기 겸임 교수,

열린 사이버대학 통합예술치료학과 특임 교수, 독서교육연구소 알움 대표,

법무부 보라미방송 ‘내 마음에 토닥토닥 책 읽기’ 프로그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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